[씽라라] 조바심 없이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나의 리듬대로
- 라라레터
- 2022년 6월 30일
- 15분 분량
이혜연님 편
이. 혜. 연. 그녀와 150여 분간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이 줄곧 저릿.. 저릿한 것이, 살면서 만났던 여러 ‘혜연’들이 생각났다. 나를 포함해서.
돌고 돌아 그녀 나름의 ‘자유하는 방식’을 떠올리고 하나씩 해나가기까지 거쳐온 그 긴 시간에 대해 결코 아쉬워하거나 억울해 하지 않았다. ‘핏(fit)’한 스텝을 밟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스스로 가지며 편안한 만족감을 가지고 있다. 자유의 보폭이 점차 넓고 깊어질 것으로 슬며시 기대되는 그녀이다.
인터뷰 자리에 나온 그녀는 많이 부끄러워했다. 과연 자신이 어떤 얘기를 잘 해줄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며 부담스러워했다. 보통 사람에게 밀착감을 주는 친근한 힌트야말로 서로를 격려하는 데에 직효가 있다는 우리의 설득에 조금씩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연극배우... 라고 말하는 것이 아직도 쑥스러운 연극배우. 드라마와 영화에서 단역도 가끔 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연극이 더 재미있는 배우.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10년 이상 전업주부로 살다 2년 전부터 조금씩 다시 활동하게 되어 아직은 마냥 다 좋은 배우. 누구 엄마가 아니라 배우라고 과감히 자기를 소개하는 게 신기하고 그래도 되나 싶은... 배우
그녀가 전해준 소개글은 그녀가 살아온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더 일으킨다. 그리고 이 자리에 딱 맞는 사람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녀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라라: 요즘 어떤 작품들로 어떤 활동 하시나요? 어떤 역할 맡으실 때 쾌감을 느끼시는지도 궁금해요.
혜연: 배우들은 자신에게 맞는 역할이나 이미지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살짝 멋쩍은 미소).
지금으로서는 기회가 되는 역할을 열심히 할 뿐이에요. 역할을 고를 수 있는 입장이 아직은 아니거든요. 드라마나 영화의 경우에 작품 가리지 않고 기회가 되면 다 하는 편이에요. 앞으로 점차 페이를 늘려가는 맛으로 (웃음). 연극의 경우엔 ‘작품’ 전체를 중요하게 보는 것 같아요. 운 좋게도 지금까지 제가 해왔던 작품들이 다 좋았던 것 같아요. 최근에 <죽은 남자의 휴대폰>이라는 작품을 했는데 아주 독특한 기발함을 가지고 있었고 무대에 오를 때마다 점점 더 좋아지는 작품이었어요. 작품이라는 것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그 작가가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썼겠구나라는 생각이 풍부해지면서 애정이 더해지는 것 같아요. <죽은 남자의 휴대폰>에서 맡았던 역할이 저랑 어울리는 부분이 있었는데, 2막에서 술취한 연기를 할 때 되게 편했어요(웃음).
아참, 그러고 보니 남편이나 자식에게 잔소리하는 역할을 할 때 약간 시원해요(웃음). 제가 평소에 누구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하고 살거든요(웃음). 이런 역할 속에서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아요.
라라: 제가 <죽은 남자의 휴대폰>, 그 작품에서 연기하시는 걸 보았는데 참으로 찰지게 잘하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혜연: 할수록 조금씩 느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요. 드라마나 영화에서 비록 단역이지만 그 짧은 대사라도 자연스럽게 하기 쉽지 않거든요. 오디션도 수 차례 봐오면서 계속 연습을 거듭하다 보니 점점 더 자연스러워지면서, 다른 잡생각을 떨쳐 버리고 ‘나답게’ 하게 되는 것을 느껴요.

라라: 일과는 어떻게 되나요?
혜연: 제가 10년의 긴 공백 후에 다시 연극을 시작한 때가 재작년, 아이가 6학년이었을 때에요. 코로나라 아이가 집에 내내 있었지만 아이가 낮에 몇 시간 혼자 있을 수 있었고, 그 시간 동안 연습할 수 있도록 극단 측에서 배려해 주었어요. 그 외 시간에는 주부로 살면서 틈틈이 걷기 운동이나 등산도 챙겨 했어요. 코로나 전엔 한국무용이랑 요가를 배웠는데 훗날 연극을 다시 하게 될 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어요. 고맙게도 연극 같이 했던 친구들이 매체 쪽으로도 해보라고 등떠밀어 주어서, 프로필을 돌리고, 배우모집 사이트에서 정보도 수집하고 섭외오면 촬영하기도 해요. 요즘에는 비대면오디션도 많아서 대사연습 해서 영상 찍어 보내기도 해요.
혜연님은 대학 때 생명공학을 전공하였다. 지금은 배우로 살고 있고, 배우가 되기 전에는 노무사로 살아가던 시기가 있었다. 그녀의 몇 차례의 전환은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참 궁금했다. 경력공백을 가진 여성들이 새로운 시도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정에 좋은 이정표를 제시해주지 않을까 기대가 되는 부분이었다.
라라: 엄마가 되시기 전에 노무사로 일하신 시기가 있었는데, 그것도 참 큰 전환인 것 같아요. 노무사에서 연극배우가 되신 부분도 그렇고요. 먼저, 엄마가 되기 전의 삶을 여쭙고 싶어요.
혜연: 대학교 시절 학생운동을 했어요. 학생운동을 한 것에 대해 어느 정도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에 그 자랑스러움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약간 부끄러웠던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제대로 열심히 못했는데 했다고 이야기하기도 부끄러웠고요. 그래서 옛날에는 말을 잘 안 했었는데,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나다 보니 별 게 아닌 것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이야기하게 되더라고요. 어쨌든 제 인생의 20대는 학생 운동을 떼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거든요. 91년에 시국이 불안했어요. 죽는 사람도 많았죠. 당시 시대적 상황 때문에 데모하러 다니면 안 된다는 생각도 없었어요. 친언니들도 데모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고 운동권 노래도 들려줘서 학생운동에 열려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교 생활이 내내 학생운동이었고, 졸업하고 나서도 2년간 더 했죠. 당시 졸업하고 나서도 계속 5학년, 6학년 학생 운동한다고 이야기 했었어요. 나름의 조직도 있었고요. 보통 6학년을 마치면 사회진출을 고민하게 되면서 더이상 하지 않게 돼요. 지하철 노조나 기타 단체로 진입하는 경우가 있고 그냥 직장에 취직하는 경우가 있는데, 어떤 선배의 권유로 노무사 시험 준비를 하게 되었어요. 노무사는 노동조합을 도우면서도 밥벌이가 되는 것이라는 말씀에 괜찮다고 생각했죠. 집에서도 ‘전문직’라고 좋아하시고.
라라: 얼마나 공부하셨어요?
혜연: 다행히 1년 안에 되었어요. 공부를 시작하고 6개월 후에 1차를 합격하고, 다시 몇 달 수에 2차가 되고.
라라: 암기력이 좋은가 봐요! 대본을 외우기에 아주 최적화된 뇌네요~!!(웃음) 노무사가 된 후에 어떤 진로를 밟으셨나요?
혜연: 노무사가 된 후 길을 찾는 게 또 쉽지 않더라고요. 노무사가 된 것이 자격증만 생긴 거지 진로가 딱 정해져 있는 게 아니에요. 물론 기존 노무법인에 들어가서 몇 달 연수를 위한 근무를 하긴 하는데 그 후가 고민인 거예요. 노무법인에 취직을 할 수도 있고, 차릴 수도 있고, 노무사로서 단체에 들어가서 일할 수도 있는 등 여러 가지 길이 있었는데 그때 또 제게 제안이 왔어요.
80년대부터 운동권과 같이 활동하는 기독교 단체가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곳 중 하나가 바로 영등포산업선교회(아래 ‘영산’으로 줄여 이름)였어요. 노동자들과 같이 숙식하면서 활동 지원을 하는 곳이었어요. 영산 간사로 일을 하고 있는 친구가 거기서 노동상담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줬어요. 뭘 할지 모르는 중에 그 제안에 응했고 거기서 일 년 정도 일을 했어요. 80년대에는 영산의 역할이 컸지만 제가 들어갔을 당시에는 많이 축소되었었어요. 근로자 수가 아주 적은 영세 사업체의 노동자들이 상담하러 오곤 했어요.
라라: 거기에서의 경험이 어땠나요? 적성이 맞았나요? 상담을 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등의 일을 하신 거죠?
혜연: 많이 힘들었다는 기억은 없어요. 영산의 역할이 축소되던 때라서, 노동상담 업무가 많지 않았어요. 오히려 당시 IMF 사태가 터지면서 노숙자가 많아져서 노숙자 쉼터를 운영했어요. 오히려 노숙자 쉼터 간사 역할을 더 많이 했죠. 당시 노숙자 분들이 대부분 IMF 때문에 몇 개월 임금체불이 되고, 집에 있기 괴로워 나와 지내시다 보니 어쩌다 노숙자가 된 신세였어요. “내가 노숙자가 될 줄 몰랐어.” 라고 울며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목사님들께서 이분들 상담도 해주시고 집단프로그램 진행하고 그랬어요.
밥을 해드렸었는데, 아침과 저녁만 해드렸어요. 안전사고 때문에, 혹시 우발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까 해서 노숙자 분들을 낮에는 나가 계시게 했어요. 그분들한테 미안한 일이죠. 갈 곳도 없는데 나가라고 그런 거예요. 그냥 그 앞 벤치에 앉아 계시다가 다시 돌아오시고 그랬어요.
거기 직원들끼리 밥을 해먹었어요. 그냥 우리 먹는 대로 노숙자분들께도 해드렸는데, 사실 당시 노숙자 쉼터 지원금이 있었거든요. 조금 과장하자면 당시 그런 지원금으로 이런 단체들이 호황을 누렸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지원금을 백프로 노숙자분들을 위해 썼을까 하는 의심도 들어요. 물론 나쁘게 쓰지는 않았겠지만, 간사들을 위해 쓰는 것도 지원금의 취지에 맞는 거지만, 사실 노숙자분들에게 더 잘 해드릴 수 있는 여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따뜻한 집밥을 먹을 수 없는 분들을 “더 잘 먹였어야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우리를 대접해주네.’ 라고 느끼시도록 정성껏 더 좋은 반찬을 드렸어야 했는데 그냥 그렇고 그렇게 해드린 게 너무 후회되요.
이 부분에서 혜연님은 살짝 눈물을 머금었다. 제대로 해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이 울컥 올라온 것 같았다.
혜연: 연극을 하다 보니까 좀 감정적이 된 것 같아요. 이런 이야길 하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쉼터의 편의만 생각하고 낮에 나가 계시게 한 것에 대해서 당시 문제 제기를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요. 좀 쉬실 수 있도록 해드렸어야 했는데, 그곳의 정해진 방침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못내 아쉬워요. 지금 생각하면 그런 것들이 너무 많아요. 하지 말았어야 할 것, 했어야 할 것들을 얘기하지 못한 것들이요.
혜연님은 자신의 20대를 회고하며, 행동했어야 했던 ‘옳은 것’들을 떠올리며, 미처 하지 못한 것에 대해 크게 아쉬워하였다. 그 땐 어렸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는 타협과 같은 것을 하지 않는 그 마음이 절감되어 뭉클해짐을 느꼈다.
라라: 노무사로 일하면서 어떻게 보면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들을 만날 기회들을 많이 가지셨을 것 같아요. 소위 다른 세계에 살던 사람들과 대면하면서 관련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도 많이 되었을 것 같아요.
혜연: 학생운동을 하면서 잘 사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어려운 사람들을 주로 바라보고 살았기 때문에,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라는 이질감을 느끼지는 않았어요. 지금도 약간… 저는 가진 것에 별로 신경쓰지 않고, 어찌 보면 서민 마인드고 그래요. 당시 ‘영산’에 채용되려면 석 달 동안 공장에서 일을 했어야 했어요. 현장체험이 필수였죠. 성수동에 있는 누전차단기 제조공장에서 일을 했었어요. 그 현장은 굉장히 충격적이었죠. 당시가 90년대 후반인데, 마치 70년대, 80년대인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아침 8시부터 밤 8시, 9시까지 일을 해요. 굉장히 공기도 안좋았어요.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는 방에서 납땜을 했어요. 연기를 날려버리는 조그만 선풍기가 있었는데 그마저도 다 주지도 않았어요. 근데 그 선풍기가 바로 코앞 연기만 날려주지 그 방안에 그대로 다 있거든요? 연기 자욱한 그 방에서 하루 종일 일하는 거에요.
당시 함께 일했던 조선족 사람들, 고등학교 갓 졸업한 아이들, 병역특례 청년들 등 스무 여 남짓 되는 사람들은 먹고 자게 해준다는 명분으로 박봉으로 늘 시달렸다고 했다. 눈 앞의 위법사항들에 대해 문제 제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늘 고민했지만, 거기 한 곳 무너뜨린다고 해서 그 사회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당시의 원칙대로 체험을 통해 문제의식을 투철히 갖는 것에 머물러야 했다. 영산에서의 1년 후 그녀는 두 명의 파트너들과 함께 노무법인을 개업했고 이후 비정규노동센터 부설로 변경하여 총 4년 정도 노무사로 근무했다.
라라: 노무법인에서 일하시는 동안 어떤 보람 또는 좌절을 느끼셨나요? 경험들을 이야기해 주세요.
혜연: 막상 직접 해보니까 마음이 너무 힘들었어요. 사건을 10개 맡으면 10개의 바위 덩어리가 내 가슴을 짓누르는 거에요. 그 사람 인생에서 이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알기에 해결이 되어야 하는데 그 해결이 너무 어려운 거예요. 기껏 잘 되어야 얼마 받고 합의하는 거에요. 이기지 못하면 너무 열이 받고 너무 힘들었어요. ‘노동위원회 앞에 가서 진짜 1인 시위를 해야 되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억울한데 올바른 판단이 내려지지 않으니 어찌 할 수가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사실은 이기고 지는 확률이 반반이거든요. 그리고 그 사람의 인생에서 물론 굉장히 큰 시련이지만 그게 또 그렇게 막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은 아닐 수도 있는데, 제가 너무 깊이 빠져들었던 것 같아요. 똑같이 양측에서 자료를 제출하는데 어떤 위원이 무엇을 채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니 법률적인 판단이라는 것에 대해 참 회의스럽기도 했어요.
사건 하다가 질 수도 있고, 이기면 기뻐해야 되는데, 저는 이기면 당연한 것이고, 지면 너무 열 받고 좌절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감정적으로 마이너스가 났던 거죠. 그리고 저는 당사자 입장에서 생각해서 저비용으로 해드리는데, 제 선에서 해결이 안 되면 변호사한테 가게 되는데 거기엔 몇 백 만원을 갖다 주는 거죠. 제가 다 해 놓은 서류를 갖다 내는데도.
여기에 더해서 당시 어머니께서 편찮으시고 곁에는 저밖에 없는 상태라 제게 크게 의지하셨었어요. 저는 밖에서 일할 때도 너무 힘든데 집에 오면 집안일도 해야 하고, 또 엄마가 종종 두세 시간 동안 엄마의 과거 고생하신 얘기, 한많은 사연들을 쏟아내시면 저도 마음이 너무 괴로운 거예요. 엄마가 너무 불쌍하고. 숨이 막힐 것 같았어요. 근무시간에도 종종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가야 하고 어쩌다 엄마가 응급실 가시면 같이 가서 병원에서 자고 출근하기도 했죠. 제게 의지를 많이 하시니 어떡해서든 빨리 일을 끝내고 집에 가야겠다 싶어서 점심은 늘 대충 사무실에서 해결하면서 일했어요.
정말이지 너무 벅차서 소화를 시킬 수가 없었어요. 엄마의 한 많은 인생을 내가 어떻게 해줄 수가 없는 건데도 발버둥을 치다 치다 계속 늪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어요. 저는 애를 낳고 오히려 ‘엄마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보통은 애를 낳고 나서 자기 엄마의 사랑을 더 느낀다는데 저는, ‘엄마는 내가 그렇게 힘들어하는데 어떻게 나를 전혀 살피지 않고 나한테 기대기만 할 수 있었을까… 난 내 딸한테 못 그럴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엄마가 너무나 힘든 인생을 사셨고 몸도 편찮으셨지만요.
전화위복이라 했던가. 그녀에게 부담스럽지 않게 적당한 시간 간격을 두고 잊을 만하면 그녀에게 한 번씩 격려의 밥을 사주곤 했던 선배가 마음에 들어온 것도 그 때였다. 너무 힘들고 어디에서도 쉼이 없었는데 그 사람이 쉬게 해준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렇게 1년을 연애하고 그녀가 편히 쉬고 자유로울 수 있는 그와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그동안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에 책임을 다하느라 늘 숨이 찼고 늘 숨이 막혔다. 결혼을 하고 일을 그만두어야겠다는 작정을 진작 했다.
비로소 찾아온 ‘그녀의’ 시간..
라라: 일 그만두고 쉬시면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셨어요?
혜연: 엄마 건강이 좀 좋아지셔서 제가 결혼을 할 수 있었는데요, 결혼하고 비로소 그저 쉬고 놀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 같아요. 저도 몸이 좀 안 좋아진 상태라 쉬면서 병원순례도 하면서 지냈죠. 그러면서 ‘제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제가 ‘좋아했던 것’을 떠올려볼 수 있었던 거죠.
‘내가 뭘 좋아했지? 내가 하고 싶은 게 뭐였지?’
대학 때부터 어떤… ‘옳은 것’을 해야 한다는 강요를 자신에게 하며 살아온 것 같아요. 엄마에게도 잘 해드려야 한다, 어떤 보상을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요. 그런데 그 때는 비로소 남편이 절 쉬게 해주니 다른 생각이 가능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연기를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연기에 대한 꿈은 사실 아주 한참 전부터 있었던 것 같아요.
‘나 어렸을 때 꿈이 탤런트였는데…’ ‘초등학교 때..학교에서 연극하면 주인공 했었는데, 참 재미있었는데..’
어릴 때 광고에서 나오는 거 따라하기도 하고, 아역탤런트 지원도 해보고 그랬어요. 사기를 당하기는 했지만(웃음). 대학교 들어갔을 때 연극 동아리를 기웃거리기도 했었어요. 근데 데모하러 다니느라고 못했죠.
20대, 노무사로서의 일, 엄마를 돌보는 것, 이 모든 상황에서 너무 제 감정을 누르고 ‘옳은 것만 생각’하면서 살았던, 그 너무 힘들었던 시간이 어쩌면 제게 도움을 준 것도 같아요. ‘이건 아니다. 옳은 것만 생각하면서 살 수는 없다.’라는 깨달음을 주었죠. 이렇게 바닥을 치니까 제가 정말 원하는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생겼던 것 같아요.
라라: 연극을 시작하실 때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행해 가셨나요?
혜연: 처음에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는데요, 그래서 제가 봤던 연극 중 재밌게 봤던 연극의 극단에서 하는 프로그램을 찾아갔어요. 민간인 대상으로 연기수업을 하고 공연을 올려주는 석 달 정도의 코스였어요. 거기서 만난 선생님들과 “연극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돼요?” 하며 이야기 나누다가 서울예대 부설 남산교육원의 연기과정에 들어가게 되었죠. 진짜 다시 대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연기 전공한 애들도 많고 현장에서 연극하던 애들도 많았어요. 생초자는 저밖에 없었죠. 아무튼 정말 즐겁게 다녔어요. 1년 과정이었는데 한 학기 지나니 거기가 없어져 버렸어요. 서울예대로 통폐합되어 없어졌어요. 그래서 교수님이 대표로 계시는 극단으로 들어가 극단생활을 시작했죠.
극단이 신생극단이어서 3기였던 혜연님 위로 1, 2기만 있어 짱짱한 위계가 있지는 않았다. 또 다행히 티칭프로그램이 잘 갖추어져 있어 배우 훈련을 많이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늦게 시작하여 마음 부담이 컸을 터인데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라라: 극단생활 하시면서 어려운 점은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혜연: 제게 스스로 느꼈던 문제점은… 확! 마음을 못 열었던 것이요. 확 릴렉스하지 못한 거죠. 그냥 편안하게 나대로 지내지 못하는, 자꾸 뭔가 ‘이러면 안되나?’하는 제어가 되었던 것 같아요. 연극하는 사람들은 그런 거 잘 하거든요. 미리 계산하면 안되고 자기 검열 같은 것이 없어야 하는데 그게 풀리지 않더라고요. 단원들과 같이 지내기에도 완전히 편하지 않고. 그들이 절 힘들게 해서가 아니라 성향이 다르다고 느껴진달까.
라라: 지금은 좀 확 열렸나요? (미소)
혜연: 그때 몇 년 연극하면서 조금 열리는 듯 했는데 아이 낳고 한참을 못하다 보니 열리다 말았죠. 지금도 여전히 조금씩 열려가는 상황인 것 같아요. 그게 쉽지 않아요. 놀아본 놈이 논다고, 연극도 어찌 보면 노는 건데, 뭘 생각하고 해서는 안되거든요.
혜연님은 <유리가면>을 첫 작품으로, <tv동화 행복한 세상>, <그놈, 그녀를 만나다>, <도시녀의 칠거지악> 등 하나 하나 작품들을 늘려갔다. 처음부터 배역을 맡을 수는 없었고, 음향 오퍼레이터로 시작하고, 한 작품으로 지하철역, 길거리, 지방극장, 대극장, 소극장에서 레퍼토리를 달리하며 수회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도시녀의 칠거지악’에 대한 그녀의 특별한 회고를 들어보았다.
혜연: 도시녀의 칠거지악, 정말 잊을 수 없는 작품이었어요. 그 작품을 진짜 한 몇 달 동안 만들었어요. 공동 창작이었는데 즉흥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해보면서 희곡을 써갔죠. 자기 경험을 토대로 글들을 써와 공유하고 그 중 채택된 것은 하나의 장면으로 만들어졌죠. 굉장히 제작 기간이 오래 걸렸지만 그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당시 많은 글을 썼던 것, 밤새 연습했던 기억, 정말 좋네요. 그런식으로 총 6개의 에피소드를 만들었어요. 이 작품의 반응이 정말 좋아서 대학로 극장에서 시작해서 여러 극장에 올렸어요.
라라: 연극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해주신다면요?
혜연: 33살 노처녀인 세 명의 안나의 이야기에요. 백안나, 이안나, 조안나, 이 세 명이 마치 한 사람이기도 하면서 다른 성향들을 갖고 있죠. 제가 나이가 많은 편이라 주인공 역할을 맡게 되었고 여러 역할도 동시에 맡았어요. 안나 엄마 역할도 했는데, 엄마가 딸 구박하는 대사도 제가 만든 기억이 나네요. “얘가 피지도 못하고 시드네..” 그런 거(웃음).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 그리고 10년의 경력공백기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공백 이후 다시 그녀의 배우로서의 길을 걸어가는 걸음 걸음을 전해 들으며 응원하는 마음이 한가득 차올랐다.
라라: 극단생활 하면서 언제 즈음 아이를 가지시게 된 거에요?
혜연: ‘도시녀의 칠거지악’ 후, ‘벚꽃 등산’까지 하고 그만뒀어요. 한 4년 정도 극단생활을 했네요. 이 때 즈음 극단생활에 살짝 슬럼프가 왔던 듯도 해요. 계속 작품을 하며 극복해갔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드는데 저는 나이도 있고 해서 그런지 슬슬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통과 행복을 함께 느끼게 해준다며, 아이를 낳아봐야 정말 인생을 알게 된다며 주변의 압박 비슷한 강추가 계속 있어왔지만 제 마음은 꿈쩍도 안 했었어요. 결혼할 때도 아이를 낳지 않기로 남편과 약속하고 했었는데. 그랬던 제가 아이를 갖고 싶어진 거예요. 그래서 저를 위해 아이를 안 낳기로 동의해준 남편을 닥달해서 사실은 아이를 원한다는 실토를 받아낸 후 아이를 갖기로 했죠(웃음). 그런데 또 갖기로 하니까 안 생기더라구요. 인공수정 다섯 번째에, ‘이번에 안되면 다시 안 할 거야.’했더니, 마음을 내려놓으니까 임신이 되었어요(웃음).
라라: 아이를 낳은 것은 혜연님에게 어떤 임팩트를 주었나요?
혜연: 임신 기간은 행복했어요. 정말 아이와 나만을 위하는 시간이었어요. 제 몸을 평생 그렇게 위해 본 적이 없었네요. 그런 시간이 너무 좋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후에 깨달았어요. 내 몸을 위한 게 아니라 아기를 위한 거였죠. 아기를 위해서 나를 위한 거지 오롯이 날 위한 건 아니었죠.
그렇게 내 몸 상태에 대해 아주 세세히 신경 쓰면서, 좋은 거 먹고 보고, 기분 좋은 일 하고, 태교하면서 너무 행복했는데, 애가 딱 태어나니까 제 자신이 진짜로 없어지는 거에요. 제 자신을 요만큼도 위할 수가 없는 거예요. 모든 걸 애한테 맞추느라 다시 나의 모든 몸과 마음은 과거의 ‘억눌렸던’ 그 때의 시기로 들어갔던 것 같아요.
라라: 다시 일을 할 계획은 어떻게 세우셨었나요?
혜연: 애를 갖겠다고 생각할 때도 막연하게 돌까지 내가 키우고 그 후에는 뭘 좀 할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상상할 수 없으리만치 오래 못하게 되었었네요. 이렇게 될 거라 누군가 얘기해주지도 않아 몰랐는데, 하지만 누가 해줬어도 귀에 안 들어왔을 거예요.
어쨌든 낳았는데 제가 왜 이리 걱정이 많았는지 몹시 전전긍긍했어요. 첫째이기도 하고 제가 그런 성향이 있나 봐요. 잘 키워내야 한다는 책임감과 부담감에 짓눌려 애가 예쁜 걸 별로 누리지 못했던 거 같아요. ‘나는 왜 이렇게 모성애가 없을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애가 예쁘다고,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이라는데, 나는 왜 이렇게 마음이 짓눌리고 힘들고 걱정되기만 할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불쌍하게도 얘는 엄마한테서도 이런 넘치는 사랑을 못 받네.’ 하는 생각이 들어 미안하더라고요. 남편은 일 때문에 매일 밤늦게 들어오고 아이하고 둘이서만 보내는 하루하루가 너무 버거웠어요. 아이랑 하루 종일 있으면서 아이가 잘 자라고 있는데 너무 걱정스러우니까 숨이 막히곤 했죠. 아이가 날 괴롭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힘든거죠. 제 자신을 조금도 보살필 수가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엄마 마음이 편한 것이 아기에게 최곤데. 아이한테 정말 최선을 다해서 잘 해주기는 했지만 마음이 행복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잘 해 준 그것이 과연 잘 해준 건가 싶은 거죠. 엄마가 아이랑 같이 있어서 좋다고 느끼는 게 아이에겐 가장 중요한 것 같은데 그걸 잘 못해준 것이 아쉬워요.
라라: 왜 그런 마음, 그런 방식이 늘 선택되었던 것일까요?
혜연: ‘당위’, ‘옳음’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거랑 비슷할까요. 잘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많았던 것 같아요. 또 한편으론 제 자신을 생각해볼 때, 냉정한 사람, 나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이야기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누군가를 돌보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고 내가 뭘 하는 게 중요한 사람인 것 같아요. 노무사 일도 노조나 근로자를 서포트하는 일이잖아요. 물론 사건에 대한 판결이나 적성문제 때문에 힘든 것도 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무언가를 나서서 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래서 아마도 저 같은 사람은 아이를 키우는 것도 적성이 안 맞는 것일 수 있죠. 적성에 맞는 사람에게도 육아가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만족감을 더 느끼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라라: 연극을 했다가 10년이라는 공백이 생겼을 때 그 상황에서 어떤 것을 겪으셨나요?
혜연: 애가 불안증세를 보여 그만 둔 것이었어서 연극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었어요. 오히려 갓 돌 지난 아이를 두고 연극을 다시 하겠다고 한 것을 후회했죠. 주변에서 독하다고 하기도 했네요. ‘내가 무슨 영화를 보자고 애를 이렇게 만들면서 했나.’ 했어요.
애가 잘못되면 다른 그 어떤 것도 정당화되지 못하죠. 그러니까 엄마는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아이랑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아이가 서너 살 되니까 데리고 다닐 수 있게 되고, 저도 집에 있기 너무 답답하니까 정말 많은 곳들을 돌아다녔어요. 동네 엄마들이 저 보고 체력 짱이라고 했어요(읏음).
아이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여름방학 때마다 제주도 3주 살기 했어요. 근데 애랑 단둘이 있는 것은 안되겠다 해서 아이 친구들을 데리고 갔어요. 엄마들이 대단하다 그랬어요. 단 하루도 둘만 있기 싫어서 치밀하게 늘 누군가 오도록 계획을 짰어요.
라라: 아이랑 같이 보내는 시간 동안 제일 잘했다 싶은 것은 무언가요?
혜연: 부모의 바람이 늘 있잖아요? 바라는 쪽으로 이끌지 않는 것이 굉장히 어렵잖아요? 사실 그 전에는 잘 못하다가 어느 시점부터는 그냥 냅두는 것,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을 잘 한 것 같아요. 동네 엄마들이 아이를 존중해주는 제 모습에 대단하다고 그랬어요. 하지만 한 때 참다 참다 버럭 하곤 했던 것 때문에 좀 예민했던 제 아이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 같았기에, 참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마음을 내려놔야지 했던 거에요.
라라: 저도 그 경지에 오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면 될지 좀 더 알려주세요.
혜연: 언제부터인가 제가 아이에 대해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공부에 대한 것’ 진짜 하나도 바라는 것이 없어요. 제가 무언가를 심어줄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아이가 스스로 겪으면서 깨닫고 아프고 당황하고 그러면서 갖춰져 가는 거거든요. 그냥 아이를 바라봐주고 응원해주는 것, 아이가 느끼는 감정에 공감해주는 것, 밥 잘 해주고 건강하길 바라는 그런 것들을 꾸준히 하는 게 좋은 거 같아요.
제가 아까 스스로 서민마인드라고 했는데요,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잘 살아야 된다.’는 생각이 없고, 가난해도 나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좋은 대학 나와서 소위 말하는 꽃길에 대한 바람이 없어요. 이 아이대로 소박하게 자기가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 찾기를 바라요. 사실 진짜 자신에 대해 잘 알고 뭘 좋아하고 뭐가 맞다는 것을 찾기도 쉽지 않은데요, 그렇기 때문에 방황도 필요하고 힘든 경험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만큼이든 저만큼 이루든 나름의 행복과 만족감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죠. 다만,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내공만 있다면 좋겠어요.
라라: 혜연님의 현재의 활동을 하는 것을 보며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혜연: 사실 큰 언니는 제게 약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어요. 아이를 낳으라고 너무 강추를 한 것에 대해서(웃음). 제가 아이에 대한 책임감, 부담감을 많이 얘기하고, 아이 때문에 연극을 못하는 모습을 보고 ‘괜히 낳으라고 했나?’하는 생각을 하는 거죠. 제가 선택해서 낳은 건데 언니가 그런 부담감을 느껴요. 어쨌든 언닌 제가 연극하는 것을 도와주고 싶어서 편찮으신 엄마 간병을 자신이 더 하면서 제게 시간을 더 빼주려고 노력해요. 남편은 늘 그렇듯 너무나 일관된 모습으로 제가 원하는 걸 하길 바라고 있고요. 남편이 요즘 덜 바빠져서 주말에도 아이를 전적으로 케어 해줄 수 있어서 저는 자유롭게 드라마나 영화 촬영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어요.
라라: 요즘 연극을 다시 꾸준히 하시고, 드라마나 영화 출연도 하시면서 어떠세요? “역시 내 일이야. 좋아~!” 이런 생각 하시나요?
혜연: 조금은 들어요. 많이는 아니고(웃음). 사실 계속 애랑 집에만 있으면서 ‘내가 뭘 하고 싶었다.’라는 것도 진짜 완전히 잊었던 것 같아요. 완전히 정말 無였어요. 오로지 애만 나를 움직이게 하는 거예요. 주변에서 같이 연극했던 애들이 나를 찔러대 주고, ‘연극은 연습 시간 길고 그러니 힘들지만 매체 쪽은 어쩌다 하루 촬영 잡히는 것이니 잘 할 수 있다.’ 격려도 많이 해줬어요. 제가 프로필 낼 수 있는 곳 정보(캐스팅 디렉터 목록)도 알려주고 많이 도와줬어요. 이 친구들 덕분에 하나 하나 하게 되면서 무언가 시작이 된 것 같아요. 좀 해볼까 해서 해보니 재미있고, 다시 옛 기억이 떠오르고 또 재미있고 그렇게 되어 가는 거에요.
‘그래, 난 무대 위에서 좋았어. 그래, 나는 무대를 좋아했던 것 같아.’
우울감에 덮여 있었던 내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밖으로 나왔던 것 같아요. 아이가 중학교 들어가면서 잘 적응할까 걱정이 되었는데 적응을 잘 해내니까 이제 걱정이 없고 맘껏 자유로워요. 그래서 작년에 연극을 세 개나 하고 올해도 벌써 두 개나 마쳤어요. 촬영도 꾸준히 있고요. 촬영하러 멀리 갔다가 집에 오면 되게 피곤하지만 그래도 뿌듯한 기분이 들어 좋아요. 지금은 진짜 나로서 활동하는 것 자체에서 되게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연기라는 거 자체는 되게 재밌어요. 연극이라는 것 자체가 놀이잖아요. 어떻게 보면 체계화된 놀이잖아요. 기본적으로 재밌어요.

라라: 정말 좋아 보여요. 너무 너무 응원합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혜연: 꾸준히 지금처럼 연극을 1년에 두 개 정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저는 드라마나 영화 쪽에서 유명한 배우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그다지 없고 꾸준히만 했으면 해요. 우리 언니는 저 보고 “ ‘우리들의 블루스’의 이정은 배우, 연기 너무 잘 하잖아? 너도 그렇게 될 수 있어.” 그러는데 그런 큰 욕구는 없어요. 현재로선 욕구가 많이 사라진 것 같아요. 유명한 배우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또 유명해진 후에도 얼마나 힘들지 잘 알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구요. 그냥 지금처럼 이렇게 조금씩 하게 되는 것도 좋고 조금씩 페이를 올려가는 재미가 있어요. 대사가 하나도 없었다가 한 마디 생기고, 두 마디 생겨가는 그 과정이 좋아요. 지금 충분히 좋아요. 또 페이를 받으니 좋더라고요. 연기로 언젠가 밥벌이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라라: 엄마로서 살고 일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그 세계로 들어가셨는데, 일과 육아, 또 그밖에 여러 가지 생활을 병행하는 여성들이 많잖아요. 그분들한테 꼭 뭔가 마음에 품고 이것만은 하셔라 말하고 싶은 격려의 메시지 있을까요?
혜연: 제 친구가 그랬어요. 제가 아무것도 안 하고 집 안에서 애를 위한 것만 하니까, “네 인생을 포기하지 마.” 라고. 그때는 내 인생을 좀 포기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나보다는 자식이 더 중요하니까 얘를 잘 키우는 게 마치 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살았죠. 세상은 자꾸, 내가 포기하면 주변이 다 편안해지는 그런 상황을 만들잖아요. 여성이 꿈을 포기하면 가정이 평화로워진다고 하니 착한 여성들은 자꾸 포기하죠. 그래도 정말 중요한 건, ‘자기가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주어진 상황에서 뭐라도 찾아서 어떡하든 조그만 것이라도 해보면서, 또 어떤 여건이 생기면 조금 더 하고 더 하고 그렇게 가는 거죠.
라라: 혜연님, 죽기 전에 꼭 이거 하고 싶다 하는 거 있으셔요? 버킷리스트 같은 거.
혜연: 배우로서 계속 제가 돈을 벌 수 있다면 그 돈은 차곡차곡 다 모아서 뭔가 작은 문화사업을 하거나 어려운 사람들 돕는 일을 하고 싶어요. 배우를 계속 하면서 다른 뭔가를 할 수 있다면 그런 일, 생각하고 있어요.
인터뷰 내내 감사한 마음이었다. 무겁게 지워지는 책임들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어려워하는 우리 여성들의 삶의 이야기를 대변해주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쏘울(soul)’과 닿는 작업을 다시 이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시는 모습에서 안도감, 위안, 격려를 전해받았다.
정리•글: 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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