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씽라라] 여전히 꿈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 라라레터
- 2022년 2월 23일
- 9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2년 6월 8일
[임소영 님]

"엄마는 그림이 그렇게 좋아? 르누아르가 죽기 전까지도 그렇게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엄마도 꼭 그렇게 그려!"
2021년 10월의 마지막 금요일 저녁에 임소영 님을 만났다. 때아닌 가을 한파가 매섭게 불어닥친 날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움직여야 하는 상황을 배려하여 소영 님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주었다. 옷깃을 세우고 종종걸음치며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바로 환한 웃음을 장착한 소영 님과 그녀의 아들이 뛰어나왔다. 그 순간 얼어붙을 듯한 몸과 마음이 따뜻하게 녹아내렸다.
우리는 맛깔스러운 식사와 미량의 알코올을 곁들이며 이야기의 온도를 높여갔다. 하나가 되어 놀던 아이들도 중간 중간 엄마들의 꿈에 대한 수다에 합류하며 자신들의 생각을 펼쳤다.
늦은 밤까지 계속된 인터뷰 이었지만 마른 땅에 샘물 터지듯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고, 오래도록 따뜻한 공기가 공간에 맴돌았다.
그날로 다시 돌아가 '치열하게 행복을 그리고 꿈을 쫓아 살라'고 이야기하던 소영 님을 다시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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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소영 님, 오늘 집으로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소영 님에 대해 잠시 소개해주실래요?
안녕하세요. 제 소개해 본 것이 까마득한 옛날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좀 당황스럽기는 한데요. (웃음) 간다하게 이야기 해보자면 저는 취미가 백만 개고 디자인 일도 조금 하는 사람이지만, 지금 가장 큰 정체성은 육아 인생 9년 차인 '엄마' 입니다.
Q: 소영 님 싱글일 때는 어떤 꿈을 가지고 살았는지 이야기 들려주세요.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저의 20대인 것 같아요. 광고회사에서 CG라는 영상 후반 디자인 작업을 했어요. 광고 일이라는 것이 워낙에 바빠서 제 생활이 없었어요. 남자친구 사귈 시간도 없었다면 아시겠죠? (웃음)
그때 제 선배들을 봤어요. 제 기준에서 이상적인 가정생활을 이끌어가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죠. 롤모델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보였어요. 일이 너무 좋았지만, 열심히 하면 할수록 불행한 가정생활을 하게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게 된 것 같아요. 저는 아이가 생기면 누군가에게 맡겨가며 일을 할 생각이 없었거든요. 그때부터 일에만 몰두하면 안 되겠다 생각했어요. 나만의 시간을 확보하고 다음의 삶을 위해 치열하게 준비했던 것 같아요.
30대에는 제 꿈을 펼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어요. 그런데, 생각처럼 일이 잘 진행되지 않더라고요. (웃음) 한 4개월 정도 일없이 지냈나?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게임 회사의 영상팀으로 다시 취업했어요. 회사에 다니면서 프리랜서가 되기 위한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어요. 퇴근 시간을 엄격하게 지키고 (웃음), 이후 시간은 개인적으로 요청 들어오는 일을 해가면서 저만의 고객을 확보하는 데 힘을 쏟았어요. 고객이 안정적으로 확보될 때까지 회사 일과 병행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치열하게 버텼어요. 그런데 마음 한 켠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들리더라고요.
"내가 살고 싶은 삶이 이렇게 일만 하는 건 아닌데.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인데… 음악도 좋아하고, 클럽 가는 것도 좋아하고, 친구 만나는 것도 너무 좋아하는데,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만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2년 반 정도 더 열정적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어느 정도 저를 찾는 고객이 생겨났을 때 회사를 그만두었고, 그 이후부터는 제 이름으로 프리랜서 활동을 계속해오고 있어요.
Q: 그럼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소영 님의 이름으로 프리랜서 활동을 계속하고 계시는 거예요?
네.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고 나서도 계속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어요. 물론 아이 때문에 시간적 제약은 있지요. 그래서 적은 양의 일만 맡아서 하고 있어요. 제 취미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벌 정도로 만요.
Q: 아이를 돌보면서 취미생활도 자유롭게 하고, 자기 일도 꾸준히 하고 계신다니요. 아이가 생긴 후 수년 동안 경력에 공백이 생긴 저로서는 상상이 잘 안 되는데요. 결혼과 출산으로 변화된 삶에서 커리어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가지고 가셨나요?
저 같은 경우는 아이가 생겨서 제 경력이 줄어들었거나 단절된 것은 아니었어요. 다만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나이가 들다 보니 무거운 일에 몰두할 힘이 부족해진다는 것을 느꼈어요. 시장에서도 젊은 친구들이 너무 잘하기도 했고요. 솔직히 '나도 서서히 내려가는 길을 밟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 의뢰도 조금씩 줄어들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육아가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에 스스로 크게 욕심내지 않고 가벼운 일 중심으로 했어요. 그러니까 예전에는 굉장히 치열하게 살았다면, 아이와 함께하는 삶으로 변화된 후로는 여유를 가지는 쪽으로 변화된 거죠. 점점 일을 줄여나가는 것을 당연한 수순이라고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욕심내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해서 할 수만 있으면 된다'는 식으로 말이죠.
Q: 조금만 더 소영 님의 이전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시겠어요? 커리어 면에서 삶에 가장 큰 변화가 있던 때는 언제였어요?
결혼 후 2년 정도 지났을 때 남편이 중국으로 발령이 났어요. 그때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프리랜서로 아주 열심히 일하고 있었어요. 아시죠? 프리랜서는 일하는 대로 다 돈이었기 때문에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 (웃음) 제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커리어를 탄탄하게 써 내려가고 있었어요. 의뢰 들어오는 일 외에도 여러 대학에서 강의도 했고, 겸임교수 자리도 제안받았어요. 어깨에 약간 뽕이 들어갔던 시절이라고 표현해요. (웃음) 그런데 중국 발령이라니요. 제 모든 것을 접어야 하는데 쉽게 마음이 동하지를 않더라고요.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일을 감당하는 것에 지치기도 했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기도 했고, 돈을 조금 더 벌어보고자 덤빈 사업도 잘 안됐고, 그래서인지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결국 모든 일을 다 접고 남편 따라 중국으로 갔어요.
중국에서 거의 하는 일이 없이 지내다 보니 '갑자기 내가 없어졌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기분이 이상했어요. 00의 와이프라는 이름만 남아있었어요. 낯선 땅에서 애써 누군가를 사귀지 않으면 사람을 만날 기회도 없었어요. 원하던 대로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을 갖기는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어요. 종종 우울감이 찾아오기도 했고, 늦은 방황으로 힘들었죠. 이러다 안 되겠다 싶어 '공부'를 해야겠다 싶어 빡센 스케줄을 짰어요. 그래야 제가 움직일 것 같았거든요.
그러다 아이가 생겼는데요. 아이가 찾아온 후로는 우울감에서 해방되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들어섰어요. 호르몬 변화 때문인지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답고 찬란해 보이기 시작했죠. 태교 겸 그동안 배우고 싶었던 꽃꽂이, 바느질, 보태니컬 아트, 중국어 등을 하며 하루를 꽉꽉 채워 보냈어요.
Q: 정말 부지런하게 열심히 배우셨네요. 지금도 다양한 취미활동을 하고 계시잖아요. 왜 이렇게 배우시는 거예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계속해서 배우러 다니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친정엄마께서 시간을 허투루 쓰는 것을 못 견디어 하시는 분이에요. 저는 그것을 온몸으로 물려받아 스트레스도 많이 받으며 살았죠. 저는 누군가 시켜서 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오래 생각하고 계획하면서 움직이는 경향이 강한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엄마의 영향이 은연중에 자리 잡혔는지 그냥 있으려니 저 스스로 한심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싫어서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하는 것 같아요.
Q: 중국에서 생활하면서 '내가 갑자기 없어진 것 같았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다양한 것을 배우면서 '나'를 찾았는지도 궁금해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잘하는 것은 무엇이며,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다, 이런 것들이 조금 보이던가요?

저는 아주 어려서부터 유일하게 잘하는 것이 미술이었어요. 너무 재미있어서 그림 그리는 것만 열심히 했어요. 대학 때 하던 아르바이트도 백화점 디스플레이, 인테리어 등 미술과 관련된 일이었어요. 이것저것 배우면서 어렸을 때의 저를 다시 느낄 수 있었는데요.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4년 전부터 민화를 꾸준히 배웠고, 지금은 민화가 저의 가장 큰 의미가 되었죠. 전시회도 하고 있고, 팔고 있기도 해요. 아직은 친언니가 저의 가장 큰 고객이지만요. (웃음)
또 사이드 취미로 하는게 있는데요. 제가 어려서 음악과 운동도 좋아했어요. 이 두 가지가 잘 믹스되어 있는 줌바를 만났는데 딱 제 취향이더라고요. 이것도 꾸준히 하고 있어요. 최근에는 요가, 피아노, 골프도 배우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어려서 좋아했던 것을 계속 이어가고 있네요 (웃음). 아, 맞다. 아들하고 같이 하러 다니고 싶은 사심에 서핑, 스케이트보드, 자전거도 열심히 즐기고 있어요 (웃음).
Q: 프리랜서 일도 하고, 엄마의 역할도 열심히 하고, 다양한 취미생활도 하는데 도대체 하루 시간을 어떻게 관리하시는 거예요?
모든 일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 돌봄이에요. 그래서 아이가 잠든 후 저녁 시간을 이용해서 경제적인 활동을 하는데요. 대략 주 10-15시간 되는 것 같아요. 아이가 학교나 학원을 간 낮을 활용해서 모든 취미 생활을 하죠. 이렇게 정해놓고 일을 하다 보니 급하게 쳐내야 하는 일은 받지 않아요.
Q: '아이가 제일 먼저'라는 말이 울리네요. 나를 찾고 싶다면 나도 모르게 일에 매몰되기 쉬운데 말이죠.
저는 20대 때 선배를 보면서 그리고 주위를 보면서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 내가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아이 낳고 나서 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여전히 난 괜찮은 척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내 옆에 아이는 있지만 난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계속 확인하려고 일도 하고, 무엇인가를 계속 배우러 다녔어요. 나를 증명해내고 싶어 고집스럽게 내 시간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아이한테 미안한 마음이 드는 일이 생겼어요. 아이가 돌이 되자마자 어린이집을 보냈는데요. 아이가 4살이 되었을 때 이사를 하면서 새로운 어린이집으로 옮겨야 했는데, 적응을 못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아이에게 집중하기 시작했어요. 아이와 있는 시간을 더 오래 갖고, 친구와 어울릴 수 있도록 매일 동네 엄마들을 만나서 함께 놀면서 시간을 보냈죠.
Q: 아이의 이상 징후를 느꼈을 때 소영 님만 생활을 바꾸어야 했잖아요. '희생'에 대한 부당함 같은 것은 없었나요? 가족 돌봄이 필요할 때 우리는 보통 남편이 아닌 엄마가 그 중심에 서려고 하잖아요. 후회하지는 않았는지 궁금해요.
그래서 남편과 가장 사이가 안 좋았던 때였던 것도 사실이에요. 모든 원망이 남편에게 갔죠. 이 상황을 또 극복하려고 심리 상담 공부도 했었어요.
Q: 뭔가 또 적극적으로 방법을 찾으셨군요!
상담 공부를 하면서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큰 변화의 지점을 이야기하면, 제가 남편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죠. 이후 시선을 제게로 돌리기 시작했어요. '내가 뭘 좋아했지? 내가 뭘 하고 싶어 했지? 예전에 나의 꿈은 무엇이었지?'를 다시 상기해 보았어요. 그때 알게 되었어요. 원래 나라는 사람은 그림과 운동을 굉장히 좋아했고, 시간이 있을 때는 여유롭게 살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런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을 때 확신이 생기더라고요. 그때부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취미 삼아 하기 시작했죠.
Q: '시선이 나에게로 돌려졌다'라는 것에 대해 더 듣고 싶어요. 어떤 변화들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었나요
나를 찾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맞아요. 줌바 댄스 하면 매번 무척 좋았어요. 그림은 제가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운명으로 받아들여졌고요.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의 몰입감이 너무 좋아요. 2000년 8월 코로나 때문에 취소된 아트페어가 있었는데, 그 준비를 위해 짧은 시간 내 여덟 점의 작품을 그려야 했었는데요. 스트레스가 전혀 안 되더라고요. 그 몰입을 다시 느끼는데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어릴 적 저의 모습을 다시 보았다고나 할까요? 그림을 그릴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학원에 남아있던 제가 다시 나온 거에요. 그 당시 엄마가 걱정되어 매일 화실로 데리러 올정도였거든요.

Q: 와, 어릴 적 소영 님을 다시 만난 순간이었군요!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취미로 시작한 민화가 아트페어 전시로까지 이어지고 작가로 데뷔한다고도 하니 제가 다 설레네요. 취미생활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커질 수 있었던 것일까요?
우선 그림 그리는 것을 너무 좋아하니까 쉽게 빠져들 수 있었는데요. 그래도 경제 관념이 좀 있는 편이라 노후 걱정이 들더라고요. 배운다면 이것으로 무엇인가를 해보자는 생각에 계속 들더라고요. 그러니까 이제 나이가 너무 들어서 1-2년 있으면 일을 못 할 것 같다는 말을 몇 년 전부터 계속해오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일 요청이 더 안 들어오는 시점에 대해 계속 생각했던 것 같아요.
물론 남편 돈으로 살아도 되겠죠. 근데 저는 스스로 돈을 버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어려서부터 받은 교육이기도 해서인지 엄마가 여성의 자립심을 강조하시기도 했고 또 실제로 아이들을 독립적으로 키우기도 하셨고요.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스스로 자기 삶을 책임지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있어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랐던 것 같아요. 사실 저도 경제권을 가지고 있으면 조금 당당하다는 느낌도 들죠. 그래서 결혼할 때도 나보다 돈이 더 많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어요. 모든 주도권을 남편이 다 갖는 것도 싫고, 기죽어 살고 싶지도 않았던 거죠.
그래서 늘 프리랜서로서의 생명이 다한 그다음의 삶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삶을 살기 위해 그 밑 작업을 지금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앞으로 계속 그림을 그리고 살 것인데, 정말 그림으로만 먹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니 앞을 조금 더 바라봐야겠다 싶은 거죠.
엄청나게 크게 사업적 플랜을 세우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나를 책임질 수 있을 만큼의 경제력을 그림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처럼 온 힘을 다해 매진하며 가는 것은 아니지만 '천천히 스트레스받지 말고 즐기면서 가자.' 이런 마음으로 흘러오다 보니 지금에 와서 전시회도 하고, 아트페어도 나가게 된 것 같아요.

Q: 나이 때문에 조급해하지 않고 일을 즐기면서 천천히 내 꿈을 그린다는 것이 너무 멋져요. 소영 님의 앞으로의 꿈도 이야기해주시겠어요?
왜 자식이 크면 공허해진다고 하잖아요. 아이가 내 품을 떠나 공허해질 때를 대비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상상도 해요. 아들이 내 품을 떠나면 나는 외국에 전시하러 다니고. 내가 전시 때문에 바빠지면 아들을 볼 시간이 없을 수 있잖아요? 아들의 삶에 연연하지 않게 되는 삶을 꿈꾸는 거예요. '아들~ 나 전시해야 해서 너 만날 시간이 없어~ 너 알아서 해. 내가 바빠서 너를 못 만나는 거야~!' 라고 쿨하게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거죠.
다시 이야기의 요점으로 돌아와서(웃음), 제 꿈은 '민화의 임소영화'가 되는 것이에요. 이를 위해서 혼자 1일 1그림 도전도 하고 있어요. 매일 드로잉 연습을 하며 필력을 쌓는 거죠.
Q: 아니, 민화의 임소영화 이야기 듣는데 팔에 닭살이 돋았어요 (웃음). 즐기자 하셨는데 원대한 꿈을 꾸고 계시는 것 아닌가요? (웃음) 이런 꿈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제가 명예욕이 있나 봐요. (웃음) 권력도 재물욕도 많은 것 같지는 않은데, 명예욕은 확실히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다시말해 '나는 임소영이야' 이렇게 살고 싶은 욕구가 계속 있는 거죠. 그림을 그리면서 '그래, 나 아직 이렇게 살아있어' 이것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돌아보면 저는 스스로 뭔가를 더 찾고 싶어 하던 스타일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괜찮은데 뭐가 부족하지? 다 채워지지 않은 것 같은데? 이런 것을 고민하다 보니 어릴 적 우리가 너무 비교를 당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살아서 그런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있어요.
그런데 이제 결혼하면서 내가 내려놓은 것도 있고, 아이가 생기면서 내 삶의 패턴이 달라지고, 다 변한 거예요. 어려서 쌓아 놓았던 성취들이 다 없어진 거죠. 이걸 또 찾으려면 치열해져야 하는데, 제 생각이 바뀐 거예요. 행복을 먼저 찾자로. 옛날에는 성공하는 삶, 소위 내가 잘나간다는 것이 최고였다면 지금은 나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고요하게 미래로 흘러가게 하는 것 같아요. 그 흐름 속에 나 자신, 내 이름 석 자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방향으로 말이에요.
Q: 소영 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차근히 나를 돌아본 후에 앞으로의 꿈을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럼, 소영 님이 생각하기에 여성에게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자기 자신이죠.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일인 것 같아요. 나라는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요. 그 곡선이 완만하지 않아도 돼요. 그래도 놓치지는 말아야 해요. 저는 그것을 놓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방법과 방향이 바뀐다고 해도 일을 통해 나의 가치를 계속 만들어가는 거죠. 저는 아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요.
"엄마는 그림 그리는 게 너무 좋아서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리고 싶어."
어느 날 학교 다녀온 아이가 저에게 말을 하더라고요.
“엄마는 그림이 그렇게 좋아?
르누아르가 관절이 아파서 연필을 손을 묶고 그림을 그렸다고 해.
죽기 전까지도 그렇게 그림을 그렸다는데, 엄마도 꼭 그렇게 그려!”
아이가 제가 무엇을 꿈꾸는지 알게 된 거예요. 저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요. 그리고 세상에 드러나고 싶기도 하고요. 또 수익까지 발생하면 더 좋고요. 요즘 갖는 꿈은 '내가 팔구십의 할머니가 되었을 때 회고전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때 사람들이 나의 그림을 보면서 감동과 지지를 보내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마치 '데이비드 호크니'처럼요. 그분도 90세가 다 되었는데도 우리나라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잖아요. 부럽더라고요. 저렇게 나이가 들어도 작품활동을 하며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 저도 그렇게 되고 싶은 것 같아요.
Q: 마지막으로 엄마로 사는 동지들에게 응원 또는 격려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우리나라 시스템 속에서 불합리한 것도 있고 그렇겠지만 그런 환경에 휘둘리지 말고 그냥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만 집중하면 좋겠어요. 그래서 치열하게 행복을 찾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라레터는 임소영 님의 다음의 삶을 응원합니다!"
더 나은 다음의 삶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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