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거리] 서로 알아갈 기회
- 라라레터
- 2022년 6월 23일
- 4분 분량
잊히지 않는 기억이 하나 있다. 초등학교(라고 쓰지만 국민학교 시절을 의미한다) 5학년쯤이었다. 어느날 하교 후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는데, 평소에 알고 지내던 친구들과는 다른 모습의 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TV에서 간혹 본 것 말고는 어디서도 마주친 적 없던 생김새의 아이를 보고 놀라서 순간 얼음이 되었다. 미동 없이 그 자리에서 머리 방향만 그녀가 움직이는 방향대로 움직였고, 눈은 그 아이의 얼굴과 몸 그리고 행동을 스캔하고 또 스캔하였다. 그러다 옆에 있던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쟨 누군데 모습이 달라?’
‘다운증후군 친구’
‘세상에 그런 친구가 있어?’
‘계속 쳐다보지 좀 말어. 불쌍하게 저렇게 건강해 보여도 20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많대.’
그날 이후, 그 아이를 놀이터에서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가끔가다가 혼자 그 아이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나와 다른 것을 불치의 병으로 생각하고 벌써 세상을 떠난 것은 아닌지 걱정 했던적도 있었다.
강산이 족히 세 번은 변한 지금, 어릴 적 놀이터에서 보았던 아이와 같은 생김새의 친구들을 거리에서 종종 마주친다. 그러니까 엄마의 말은 틀렸다. 그 아이는 나이가 들어도 학교에, 편의점에, 마트에, 지하철에, 동네 공원에서 마주칠 정도로 나와 가까운 거리에 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없었고 지금은 있는 이유가 이해되지는 않지만, 어릴 적 다시 볼 수 없었던 그 아이가 지금 내 옆을 때때로 스쳐 지나갈 때면 놀이터에서 얼어붙어있던 어린 내가 떠오른다.
*
어느 일요일 오후, 가족들과 식사하러 들어간 곳에서 눈에 들어오는 청년이 있었다. 얼굴 생김새와 손 모양이 달랐고, 불편해 보였다. 옆에 앉아있던 아들도 그렇게 느꼈는지, 한참 동안 그 청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들의 시선에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으면 어쩌나 하는 미안한 마음 전합니다) 그 옛날 내가 학교, 떡볶이집, 문방구,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가, 놀이터에서 처음으로 내가 만나던 아이들과 다른 모습의 아이를 조우했을 때의 모습과 똑 닮아있었다.
뭐라고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지만, 이 또한 엄마의 기우가 되거나 옆 테이블에 실례가 될까 입을 차마 열지 못했다. 다만, 아이의 시선을 나에게 돌려야겠다는 생각에 아이에게 화젯거리를 던지며 관심을 싹둑 잘라내 버렸다.
*
어릴 적 주위에서 거의 볼 수 없던 다른 생김새의 아이들. 만날 기회가 없어서, 이야기하고 놀아 본 경험이 없어서,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 내지는 에티켓을 모른다 (깨닫고 배울 기회가 없었다고 강조하고 싶다). 그러니 아이에게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하는 태도, 에티켓에 관해 설명할 때도 다수의 사람에 치중해서만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이미 머리에 누군가는 배제되어 있어 그렇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면서) 습관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도 있지만, 이 또한 이전에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것이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더 맞는 이야기일 듯 하다. 찾아내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상, 자연스레 만나 서로 알아가고 친해질 기회가 우리에게는 아직 매우 부족하다.
*
얼마 전 장애아이의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초등학교를 일반 학교로 보냈는데 생각보다 적응도 잘하고, 감사하게도 반 친구들이 잘 이해해주고 차별이나 배제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무엇보다 선생님의 헤아림에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반에서 유일하게 신체적 불편함이 있는 지인의 아이를 위해 학급 친구 모두에게 장애 인식 교육을 제공하였고, 장애 감수성을 키우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걱정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사자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에도 학우들은 계속 도와주려고 거들었다. 그럴 때마다 당사자 본인은 모든 일에 도움을 받아야 하는 아이인가 하는 마음이 계속 자라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반대로 본인이 도움을 받으니 대등하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학우들보다 먼저 나선다고 한다. 이 경우는 학우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 당한 것 같아 상처를 입는다고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아이는 친해지기 위해 한 학우에게 다가가서 툭 건드렸는데, 힘 조절이 안되니 강도가 세게 가해졌고 그 학우는 아파서 울었다고 한다. 의도치 않게 이유 없이 친구를 때린 것처럼 되어버렸다. 허용과 제지의 범위를 어떻게 두어야 할지 엄마 스스로도 판단이 안 선다고 하였다. 안타까웠다.
그래도 이런 경험들이 쌓여야만 사회적 관계가 생길 것이라 믿는다. 당사자 부모는 피해 입힐까, 피해 입을까 마음이 늘 편하지 않겠지만, 이 또한 우리가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경험일테다. 일반적으로 친구를 만들고 사회적 관계를 쌓아가는 과정이 어디 쉬운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면 알고 피부로 느낄 수 있게 기회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같은 공간에서 계속 보고, 나누고, 부딪히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있어야 나와 성격이 맞는 사람이지도 알 수 있고, 진짜 서로 이해하고 소통하며 함께 연립하여 살아가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
아들과 함께 읽은 「가방 들어주는 아이」라는 책은 우리가 흔하게 만날 수 없는 사람과의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다리가 불편한 영택이와 반 친구가 된 석우는 가까운 곳에 산다는 이유로 매일 영택이의 가방을 들어준다. 그렇다고 바로 친구가 되지는 못한다. 주변 친구들의 놀림도 그렇고, 마음에 들지 않아서도 그렇고, 매일 책임져야 하는 상황도 싫다. 그래도 석우는 몸이 불편한 영택이에게 과한 친절이나 돌봄을 베풀지 않는다. 그리고 석우도 영택이에게 적절할 때 친절과 마음을 받는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닌 서로가 할 수 있는 선 안에서 상호호혜적인 관계를 만들어간 것이다. 또, 친구로 서서히 스며들게 된 것은 1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싫은 마음, 불편한 마음, 걱정되는 마음, 안타까운 마음, 미안한 마음, 고마운 마음 등 여러 마음을 느끼고 나서다. 그 시간동안 석우는 영택이를 진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영택이가 석우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친구가 되는 시간과 과정이 좋았다. 그동안 나는 장애는 동정받거나 돌봄을 받아야 하는 수혜의 대상이라고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진짜 친구가 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닌 약한 자를 도와주며 도덕적 선행을 쌓는 행위로 만족하면서 말이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 받는 게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오월의 봄(2019))
다름을 받아들이면서 각자가 있는 모습 그대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 알아갈 기회를 갖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거리에서 서로 알아가고 친해지는 경험, 그 기회 말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 기회를 만들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나 묻고 싶다. 얼마 전 학교 체험학습에 장애 학우 참여를 말리는 학교에 대한 기사를 접했다. 아이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는 이유로 참여하지 말아주기를 요청했다고 하는데, 당사자 엄마는 아이가 본인의 신체적 장애 때문에 배제되는 경험이 안에 켜켜이 쌓일까 가슴아프다고 했다.
할 수 있음과 없음을 기반으로 장애와 비장애로 구분된 사회 시스템. 또 시혜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동정을 던지다가, 어떤 상황에서는 차별과 배제를 하는 시스템. 내 아이의 옆 짝꿍이 될지도 모를 아이의 다름과 차이를 알아가고, 이해하고, 수용하면서 친해질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사회도 함께 생각보아야 할 것이다.
더 나은 다음의 삶을 위해
Truly Yours, 우정

[인용: 밴드 잔나비 앨범 커버]
참고문헌:
고정욱 저 | 백남원 그림 <가방 들어주는 아이>, 사계절 (2002)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오월의 봄 (201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본 컨텐츠는 라라레터의 지식 재산권의 해당하며, 무단 도용할 경우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