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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기획] 팬데믹 시대, 평안하십니까?(4) by 재은

  • 작성자 사진: 라라레터
    라라레터
  • 2022년 6월 2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2년 6월 8일


<엄마의 노동은 당연하지 않다>



글쓴이: 심재은

(소개는 글 하단을 보아주세요)


육아는 노동집약적인 서비스다. 나에게는 살면서 해 본 일 중에 단연코 가장 어려운 일이다. 너무 편하게 살아왔는지는 몰라도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이런 강도의 육체적 노동을 해본 적도, 이렇게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느라 애를 써 본 적도 없다. 고객은 나에게 돈이라도 벌게 해준다지만, 이 자식들은 내 돈을 쓰는 주제에 내가 비위도 맞춰주고 노동력도 제공한다.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으면서 나는 아이를 셋이나 낳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구한 사연은 지면이 모자랄 것 같아서 생략한다. 어쨌든 내게는 딸이 셋 있다. 큰아이는 열 살, 둘째는 네 살, 막내는 15개월이 되었다. 내 피 같은 이 아이들을 몸과 마음을 바쳐, 무엇보다 등골을 있는 대로 뽑아가며 정성을 다해 키우고 있는데 이들이 나중에 이 노동집약적인 서비스 활동을 한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안타깝고 아까워 죽겠다. 나를 그렇게 키웠고, 나의 육아를 십 년째 도와주고 계신 우리 엄마도 종종 하는 이야기다.

사실 더 겁이 나는 것은, 지금의 우리 엄마처럼 내 딸들의 사회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더 나이가 들어서도 또 조그맣고 사랑스러운 존재에게 내 노동력과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딸이 하나도 둘도 아니고 셋이나 되는데!)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내가 결정할 일은 아니지만, 지금 마음 같아서는 내 딸들이 결혼 같은 건 안 했으면 좋겠다.


큰아이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먼저 아이를 학교에 보낸 사람들로부터 ‘학교 갈 준비’라는 명목으로 무수한 조언을 받았다. 한글이니 수학이니 이런 건 기본이라 조언 축에도 못 들었고, 줄넘기도 미리 해 두면 좋고, 종이접기도 능숙해야 하고, 가위질도 집에서 좀 시키고, 급식을 먹을 때 어른 젓가락을 써야 하니 미리 연습해야 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우유갑도 혼자 따보게 하라는 소리도 들었다. 조언해 준 엄마들이 유난해서가 아니라 다 자신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애정 어린 조언이었기에 학교가 도대체 뭐 하는 곳인데 아이가 실수하고 실패하는 것이 그렇게 용납이 안 되는 건가 싶고, 학교에서 무언가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아이의 다양한 능력치를 올려놓으면 공신력을 가지고 그것을 평가하는 것이 학교의 주요 기능인가 싶어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이 생기면서 우리 큰아이는 학교 문턱을 넘어보지도 못하고 한 달을 그냥 보내다가 EBS 교육 방송을 통해 학교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잠옷 입고 TV 앞에서 밥상을 펴 놓고 수업을 듣는 것도 기가 찰 노릇이고, 방송에 나온 선생님이 이 문제는 여러분들이 한번 풀어보라고 하고는 금세 답을 알려주어 아이가 그대로 보고 받아 적고 있는 것도 복장이 터졌지만, 무엇보다 나를 화나게 했던 건 따로 있었다.

어느 날 아침에 아이를 깨워 대충 먹이고 부랴부랴 TV 앞에 앉혀 방송이 시작되니, 갑자기 우유갑과 가위, 풀을 준비하라고 한다. 우유 급식하는 학교도 아니고, 갑자기 우유갑이라니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 집은 PET에 담긴 우유를 먹고, 그나마도 절반 이상 우유가 남아있었다. 다른 어떤 날은 또 시작하자마자 종이컵 하나와 뒷면에 색이 없는 색종이를 가져오라고 한다. 분명 어딘가 있었던 종이컵을 찾는 동안, 아이는 뒷면에 뽀로로가 그려진 색종이밖에 없다며 울상이고 화면 속 선생님은 종이컵의 배를 갈라 입이 벌어지는 인형을 뚝딱 만들었다.

물론 그냥 화면만 쳐다보고 넘어가도 상관없는 부분이었지만, 학교도 안 가는 마당에 저런 건 그냥 대충 넘어가도 된다는 것부터 가르치기도 참 석연치 않고, 이럴 땐 꼭 나타나지 않는 종이컵을 허둥지둥 찾으며 아이의 투정을 듣는 것은 아침 댓바람부터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 이들은 엄마가 도깨비방망이라도 들고 아이 옆에 가만히 앉아있는 줄 아는가 보다. 갑자기 우유갑을 내놓으라 하면 엄마는 그저 헐레벌떡 집안 쓰레기통이라도 뒤져 대령해야 하는 건가. 아무리 방송이라지만 자기 혼자 뚝딱 만들 거면 준비하라는 소리는 왜 하는 건가.

그나마 EBS도 하루에 30분 짜리 2개만 보고, 나머지 수업은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준비한 학습지를 푸는데, 아이가 혼자 해결할 수 없는 활동이 너무 많다. 대놓고 엄마와 함께 무릎장단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라며 악보가 그려져 있기도 하고(하루 종일 애들과 재택 근무하는 남편까지 복작대고 있는 마당에 무릎장단을 치라고!!), 그냥 뒤집으라는 건지 뒤집어 까라는 건지 그림만 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놈의 종이접기는 완성본을 교재에 붙여서 등교할 때 제출하라 했기 때문에 흥미가 없는 아이 대신 내가 색종이를 붙들고 씨름하다 부아가 치밀어 올라 아이든 남편이든 걸리는 대로 엉뚱한 데다 결딴을 내곤 했다.


바이러스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학교가 문을 닫고,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 재택근무가 실행되었다. 이러한 사회 기관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자 그 부담은 가정으로 떠넘겨졌다. 이렇게 가정에 넘겨진 부담은 많은 부분 엄마가 짊어지게 되었는데, 갑자기 많은 역할과 업무를 떠맡게 된 엄마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는 아무도 고려하지 않았다. 종이컵 좀 찾아주고 무릎장단을 치라고 해서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며 엄마가 이런 일을 떠맡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회의 암묵적인 태도, 엄마의 노동을 당연하게 여기는 그 고약한 태도가 아주 괘씸하다.


2021년 기준 경력단절여성은 145만 명에 이르고, 그중 43%가 퇴직 사유를 ‘육아’로 꼽았다. 이는 관련 조사가 시작된 2014년 이래 역대 최대치라고 한다(2021년 11월 4일 세계일보). 엄마의 몸을 바쳐 아이를 낳고, 엄마의 커리어를 희생하고 노동력과 서비스를 집약하여 아이를 키워내면 결국 그 아이는 이 사회의 자원이 된다. 아이를 낳았으면 물심양면으로 그 아이의 건강한 성장을 지원하고 돌보는 것은 부모의 당연한 도리이다. 그러나 개인을 희생시켜 사회의 공공재를 생산해내는 시스템과 그 희생의 주체가 엄마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태도가 만연하다는 것은 반드시 돌아봐야 할 문제이다.

물론 고용노동부는 일,가정 양립을 위한 모성보호제도의 확대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팬데믹 상황과 같은 유사시에 사회 기관이 수행하지 못한 기능을 당연하다는 듯 엄마에게 떠넘겨 놓고 어쩔 수 없다고 도외시하는 것은 아직 엄마가 묵묵히 수행하는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적 태도를 반영한다. 그래서 모두가 집안에 들어앉아 힘들고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이 상황에 엄마에게 갑자기 우유갑을 내놓으라고 하거나, 처음 보는 악보를 따라 노래를 부르며 아이와 즐겁게 무릎장단을 치라고 하는 것이 이상하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아직도 코로나는 우리 주변에서 머무르고 있지만, 어느 정도의 일상은 돌아오고 있다. 학교도 정상화되고 그동안 아이들을 데리고 가지 못한 놀이공원이며 워터파크도 다녀왔다. 모두가 똑똑히 알아야 한다. 이런 일상이 다시 돌아오기까지 드러나지 않는 집 안에서 남모르게 흘렸던 엄마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음을. 무탈한 일상에 감사하며 오늘도 기꺼이 수행하는 엄마들의 노동은 절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Photo by Tim Mossholder on Unsplash]


글쓴이: 심재은 본캐는 딸 셋 엄마. 부캐는 프리랜서. 상담심리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상담했는데, 첫 아이 출산 이후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 위해 강사가 되었다. 국제고등학교에서 심리학을 강의하는 일이 주업이지만 사실 페이 맞고 시간 맞으면 뭐든지 하는 잡부. 친정엄마의 헌신적인 도움과 대충 구워 삶아지는 남편 덕분에 일과 육아와 가사 세 마리 토끼를 잡고 있다고 하지만, 세 마리 토끼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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