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기획] 팬데믹 시대, 평안하십니까?(3) by 하나
- 라라레터
- 2022년 5월 26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2년 6월 8일
<반경 1킬로미터>
글쓴이: 서하나 (소개는 글 하단을 보아주세요)
또각또각또각
복도를 지나가는 구두소리가 멀어진다. 다시 아침이다.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생각한다. ‘어차피 누굴 만날 일도 없는데 굳이 씻어야 할까?’ 잠시 망설이지만 이내 벌떡 일어나 이불을 빳빳하게 정리하고 욕실로 향한다. 최소한의 인간의 모습이라도 갖추려면 씻기라도 해야 한다.
오전 9시. 노트북 전원을 누른다. 코로나19 이야기가 솔솔 나오고 마스크 대란이 일어날 즈음 퇴사해 지금 나의 일터는 방 한 켠에 놓인 책상이다. 하루분의 커피를 내리고 자리에 앉는다. 메일을 보내고 몇 가지 일을 처리한다. 문득 시계를 보니 10시 10분 전. 당장 할 일이 없어 손만 만지작거린다. 이때가 기회라는 듯 답도 안 나오는 고민들이 뇌의 주름 틈새 틈새에서 삐죽삐죽 솟아난다. 이럴 때는 산책이다.
삭막한 오피스텔을 벗어나 퐁퐁 솟아난 어린잎들이 진한 초록으로 변해가고 있는 산책로로 향한다. 초고강도 거리두기가 탓일까.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정적이 흐르는 산책로에 가득한 것은 자연의 소리뿐이다. 졸졸졸 물이 흐르고 사그락사그락 나뭇잎이 흔들리며 꾸웩꾸웩 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인공의 소리라고는 끼어들 틈이 없다.
언제나 발걸음을 멈추는 곳에 다다라 청둥오리 가족을 찾는다. 오늘도 엄마 청둥오리 뒤를 아기 청둥오리들이 열심히 쫓아다닌다. 갑자기 아기 한 마리가 일탈해 둑으로 올라가며 탈출을 꿈꾼다. 지켜보던 엄마는 서둘러 쫓아가 앞을 막아선다. 탈출 실패다. 청둥오리 가족을 한참 바라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걷는다. 카페 오픈 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한다.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생긴 버릇이 있다. 카페든 식당이든 오픈 시간에 맞춰 간다. 사람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다보니 약속을 잡고 사람과 만난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빨간 벽돌 아치 사이에 끼워 넣은 듯이 자리 잡은 카페에 오늘도 첫 손님으로 들어간다.
카페에서 멍하게 시간을 보낸다. 수첩에 무언가를 끄적이다가 심심하면 책장으로 시선을 돌리고 카페 문 앞에서 밥을 달라며 기웃거리는 고양이를 바라보며 카페 주인과 이야기를 나눈다. 눈앞에 놓인 수국은 오늘도 연한 보랏빛으로 활짝 펴 있다. 매일 비싼 커피를 마실 수는 없으니 최대한 있을 수 있는 만큼 머문다. 두 시간 남짓 동안 손님은 나 혼자. 카페 문을 나서며 제발 이 자리에 오랫동안 있어 달라고 기도한다.
늦은 오후다. 할 일이 딱히 없으니 책이라도 읽을까. 침대 옆에 둔 스툴에는 책 탑이 쌓여 있다. 여러 책을 동시에 읽다 보니 이 탑은 끝도 없이 쌓이기만 한다. 무슨 책을 읽을까 뒤적이다 결국 가장 위에 있는 책을 집어 든다. 한참을 읽다 보니 어느새 꾸벅꾸벅. 깜짝 놀라 일어난다. 커튼을 걷고 밖을 보자 대각선에 있는 오피스텔 창문들이 빨갛게 물들어 있다.
이제 슬슬 저녁을 해볼까. 냉장고를 열고 있는 재료로 저녁을 만든다. 오늘 반찬은 간장으로 양념한 돼지고기 숙주볶음이다. 만드는 건 한 시간인데 먹는 건 20분. 설거지를 하고 좋아하는 일본 드라마를 본다.
밤 10시. 슬슬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스탠드를 켜서 조도를 낮추고 책 탑에서 다시 책을 꺼내 읽는다. 이내 잠이 몰려온다. 책을 덮고 이불로 푹 들어간다. 내일은 또 무얼 하며 보낼까. 일상이 이렇게 단순해도 될까. 지금까지 이렇게 고요하게 쉬어본 적이 있을까.
반경 1킬로미터. 내 일상이 이루어지는 범위다. 이제는 교복이 된 청바지에 검은 티셔츠를 입고 오직 걸어서 카페로, 도서관으로, 산책로로 향한다. 어디든 갈 수 있다가 어디도 못 가게 되자 완벽하게 좁고 단조로운 세계에 놓였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어쩔 줄 몰랐다. 고립된 듯해 외로운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가짜 외로움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동안 진짜 외로움을 감추기 위해 만들었던 분주함이 갑자기 사라져서 오는 가짜 외로움일 뿐이었다.
단조로운 일상이 길어질수록 고독이 깊어짐을 느낀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외로움과는 또 다른 감정이다. 외로움이 어느 날 갑자기 파도처럼 밀려온다면 고독은 매일 잔잔한 물결처럼 흘러간다. 세상은 웅성이는데 마음은 수평선을 그린다. 고요하다. 이상하게 편안한 날들이다. 편안해서 무서운 날들이다. 팬데믹 이후 두 번째 맞는 계절이 지나간다.

*글쓴이:
서하나는 일한번역가이자 출판기획편집자다. 프리랜서의 숙명처럼 일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사라지는 날들을 보내며 일이 없을 때는 글 쓰는 곳에 기웃거린다. 한가하던 시기에 갈매기 자매 유닛을 결성해 서울과 도쿄의 이야기를 전하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책을 번역하고 만드는 일을 평생 하는 게 꿈이다. 간간이 일본 전통 그릇 수선 방식 킨츠기로 깨지고 상처 입은 그릇을 고친다.
* 인스타그램 개인 계정 @kotobadesign
* 갈매기 자매 @kalmegi_kamome_sisters | www.kalmegi-kamome-sister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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